이런 건 레트로 안 해도 되는데요. 0
레트로(RETRO)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한 뜻은 제가 잘 모르구요. 영어 retrospect(회상, 회상하다)의 준말로 흔히 옛날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패션, 미디어, 인테리어, 가구 등 다양한 영역에서 '레트로' 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취향에 따라서 <레트로 제품> 만 모으는 사람들도 있죠. 어떤이들은 아련한 추억을 타고, 어떤 이들은 낯선 것이 주는 신선함에 이끌려 레트로 제품이 인기가 많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 옆집에 살던 오빠가 있습니다. 두 살이 많았나, 세 살이 많았나?
장난기 많고, 성격 좋고, 웃기는 말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했던 오빠였습니다.
안경을 썼고, 말랐고, 여드름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오빠는 늦둥이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오빠의 부모님이 연세가 조금 있으셨어요.
고불고불한 골목길 안 쪽에서 매일 부대끼며 살던 그야말로 '이웃'이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오빠네가 먼저 이사를 가고 이어 우리집도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어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나? 아주머니가 찾아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불쑥 오셨었는데, 당시만 해도 동네에 와서 <누구누구 네 집> 아냐고 물어보면 대문까지 데려다 주던 시절이니까요.
"이사 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짬을 못 내서 이제야 찾아왔다." 며 급하게 오다 보니, 선물도 제대로 못 사왔다고 분홍색 쟁반 하나를 머쓱하게 내미셨어요.
엄마는 반가워 하시면서 아주머니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셨고,
저는 주방에서 음료수를 준비했습니다.
방안에서 엄마랑 아주머니가 얘기하시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아유, 어떻게 지냈어요? 연락 한 번 한다는 게, 나도 사는 게 바빠서... OO 이는 뭐해?"
".......우리 OO 이가..... 죽었다."
이후에 엄마랑 아주머니가 끌어안고 엉엉 우신 것만 기억이 납니다.
오빠는 군대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상사의 지시로 드릴인지 무슨 공구를 사용해서 작업을 했는데 장비가 노후되어서 전선 피복이 벗겨졌다던가?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전날 작업 중에도 위험하다고 말을 했다고 했었는데, 그 정도는 괜찮다면서 그냥 하라고 했답니다. 결국 <까라면 까야> 하던 군대에서 스무 살 오빠는 감전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의 외가는 경북 예천입니다.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외숙모 한 분만 계시는데요. 작년 폭우 소식에 혹시나 했는데, 저희 외숙모가 살고 계신 동네였습니다. 동네 명칭이 바뀌어서 처음엔 몰랐습니다. 별 일이야 없겠지 생각하면서도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외숙모께서 당신은 괜찮으신데 동네 반쪽이 떠내려갔다며 한숨을 쉬시더군요. 몸조심하시고, 괜히 밖에 나가지 마시고, 여차하면 회관 가서 주무시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뉴스가 나올 때마다 후속 처리는 어떻게 되었나, 조금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마을에서 어린 군인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네, 채해병입니다.
외숙모의 아들, 제 사촌 오빠는 해병대 출신입니다. 오빠가 휴가 나와서 저희집에 놀러온 모습을 기억합니다.
하얗고 순둥순둥 하고, 심지어 예쁘기 까지 했던 오빠가 까맣게 타서 해병대 군복을 각잡아 입고 나타난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각자 다른 세상을 살았던 이 세 명의 청년이, 서로 만난 적도, 스친 적도 없을 세 청년이 시대를 거슬러 자꾸 얽혀버립니다.
경북 예천 출신의 한 청년은 이제 5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배 해병이 자기 동네에서 급류에 휘말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20년도 전에 군의 안전불감증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동네 오빠는 설마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냐고 하늘에서 만난 또 다른 청년에게 묻지는 않았을까요?
한 청년이 죽었는데. 그 집단의 최고 책임자인 사단장은 죄가 없답니다.
대통령은 (명품백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공인받은) 영부인의 손을 잡고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국내에 대통령이 부재 중인 이 때 , 한덕수 총리 주재의 국무회의에서는 채해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을 의결하였습니다.
나라 꼬라지 참, 잘 돌아갑니다.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이런 건 좀 안 해도 됩니다. 시계를 어디까지 돌릴 셈이세요?
치밀어 오르는 쌍욕을 삼키느라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