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의족장애인 태권도 7단이 되었나? 0
나는 1983년 24세 병장말년,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내에 작전을 수행하는 수색대원이었다.
전역 1개월여를 앞둔 여름, "김병장은 작전 들어오지 말고 부대 잔류해" 라는 자상한 소대장님의 거듭된 명령?을 거역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비무장지대 작전을 수행하다 지뢰폭발 사고를 당하였다.
부서진 다리를 보면서 도저히 믿기지 않고 포기할 수 없가 없어서 ..
가망이 없다는 군의관님에게
다리를 꼭 낳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어머니에게 가야 한다고..
조르고 협박해서 말로 다할수 없는 고통을
참으며 1달여 치료를 하였지만..
결국 더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단하고 말았다.
태권도 사범이 되고자 했던 전역 후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전역 후 고향에서 표류하는 고장난 배처럼
동네 점방에서 술만 먹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식 눈치를 보며 묵묵히 농삿일만 하시는 어머님 보기가 넘 죄송해서
책 외판원을 하고, 운전 기사를 하고,
생산직 공장에서 일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모든일이 쉽지 않았고 흥미가 없으니 절망감만 더하여 갔다..
공부는 별로 취미가 없었지만..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지을수가 없어서 입시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27세때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31세에 부산교통공사 공채로 입사하였다.
역무원 일은 승차권매표, 역사 소방, 안전관리, 승객서비스, 편의시설물 관리, 취객 열차내 부당 상행위 단속등을 수행한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90년대 초에는
출근하면 열차내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이 역무원들의 주요 업무 중에 하나였다.
열차내 상행위를 하는 분들이
힘들게 살아온 분들인지 대개 거칠고 역무원들의 단속에 순순히 응하는 경우가 없고
가끔은 폭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분은 단속하는 역장을 안고
같이 죽자며 철길로 뛰어내려 위험한 일도 있었다..
특히 다리에 장애를 입고 허약한 몸으로 단속하는 일은 부담되는 일이었다..
취객이든 부당 상행위를 하는 분들은
단속을 개의치 않고 나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무원 일을 정년까지 잘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하였다..
정년까지 버틸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마흔을 넘기니 잠잘 때 식은땀이 나고
몸은 더욱 허약해 지고 마음도 나약해져 갔다
청소년때 태권도를 해서 체력도 좋아지고 자신감도 생겼고,
군에서는 태권도 3단 유단자로 부대태권도 선수와 조교를 하며 선임들에게 사랑을 받고
수색대원으로 군 생활을 보람차게 할 수 있었는데..
사고후 의족 장애인이 태권도를 하는 경우를 본적도 없고, 나도 태권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정년까지 잘 마칠려면 태권도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할수 없을 것 같던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부산 동부도장 이상정 관장님은
일면식도 없는 나의 상담을 받고,
할수 있겠느냐고 걱정을 하시며,
어린 아이들과 운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열쇠를 하나 주시며 시간 되는 대로 언제든지
체육관에 와서 운동하라며 배려해 주셨다.
이상정 스승님은 나이 마흔에 태권도를 해 보겠다는 허약한 나에게,
용기와 격려를 해주신
진정한 태권도 스승이시다.
처음에는 발차기, 중심 잡기가 도저히 되지 않았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며칠 체육관을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잘 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놀아도 체육관에서 놀자는 심정으로 체육관에
나갔다.
그러면서 다리를 단련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의족 찬 다리는 물집이 잡히고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나으면 다시 달리기를 하고 체육관에 나갔다..